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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체제와 문화

조선의 체제와 문화. 조 선 행 정 사. 행정 서상오. 중앙과 지방의 정치행정 조선의 사회경제와 문화. 蒙古. 蒙古. 遼. 金. 西遼. 遼. 蒙古. 西夏. 西夏. 金. 高麗. 高麗. 高麗. 高麗. 高麗. 元. 北宋. 宋. 南宋. 南宋. 大理. 大理. 성리학의 태생적 특성. 조선의 보편적 의식기반. 성리학적 유교관. 정통 / 명분과 의리중시 ( 도덕적 정당성 ). 복고적 이상향 지향 ( 절대적 진리 ). 비현실적 관념적 성향. 종법적 유교윤리 구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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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체제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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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ation Transcript


  1. 조선의 체제와 문화 조 선 행 정 사 행정 서상오

  2. 중앙과 지방의 정치행정 • 조선의 사회경제와 문화

  3. 蒙古 蒙古 遼 金 西遼 遼 蒙古 西夏 西夏 金 高麗 高麗 高麗 高麗 高麗 元 北宋 宋 南宋 南宋 大理 大理 성리학의 태생적 특성

  4. 조선의 보편적 의식기반 성리학적 유교관 정통/명분과 의리중시 (도덕적 정당성) 복고적 이상향 지향 (절대적 진리) 비현실적 관념적 성향 종법적 유교윤리 구현

  5. 1 2 3 4 5 조선시대 법 체제 조선시대 중앙관제 조선시대 지방관제 조선시대 사회활동과 신분제 조선시대의 문화

  6. 조선 경국전 (朝鮮經國典) : 태조 3년 경제육전 (經濟六典) : 태조 6년 경국대전 (經國大典) : 성종 16년 속대전 (續大典) : 영조 22년 대전통편 (大典通編) : 정조 9년 대전회통 (大典會通) :고종 2년 조선시대 법 체제 조선 경국전 : 1394년(태조 3) 3월에 정도전(鄭道傳) 개인이 편찬하여 진상 유교 원리에 입각한 6조에 의한 국가운영의 기준 제시 법 경제육전(원육전) : 조선 태조 6년(1397)에 정도전, 조준 등이 편찬한 조선최초의 공적인 법전으로 육전체제를 갖추고 있음 대전회통 : 1865년(고종 2)에 조두순등이 왕명에 의해 ≪대전통편 大典通編≫ 체제 이후 80년간의 수교(受敎), 각종 조례(條例) 등을 보첨, 정리한 조선시대 최후의 통일 법전. 6권 5책. 목판본. 속대전 : 1746년(영조 22)에 김재로가 ≪경국대전≫의 시행 이후에 공포된 법령 중에서 교령(敎令)과 조례(條例 )만을 추려서 편찬한 통일 법전. 6권 4책 대전통편 : 1785년(정조 9) 김치인이 왕명으로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그 뒤의 법령을 통합해 편찬한 통일 법전. 6권 5책. 목판본.

  7. 경국대전의 의미 세조이래 30년 혹은 고려말기 100년의 법률제정사업의 완성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 통치체제의 기반 <형전>의 자녀균분 상속법 , <호전>의 매매 및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대한 규정 <형전>의 민사적 소송절차에 대한 규정 등은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 일방적 법률창조가 아닌 기존 법률의 성문화로 중국 법률의 침투를 예방 조선의 고유한 법적 전통을 보전 경국대전 관리임용 자격에 천민이상 규정의 비명문화로 중세보다 한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나 형전에 노비에 관한 세밀한 규정으로 천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것은 아니라고 보여짐 당시의 한계상을 그대로 반영 (국왕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규정이 없음)

  8. 경연제도는 중국 宋代에 유일하게 시행된 법으로 신하가 세자의 스승이 되어,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스승으로서 대우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국왕이 신하들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우위가 아님을 말해준다. 수령의 임명, 군율의 시행, 논공행상, 청병(請兵), 둔전(屯田), 공물 진상, 시체 매장, 군량 운반, 훈련도감의 설치, 산천 제사, 정절(貞節)의 표창 등 군정·민정·외교·재정에 이르기까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사무를 처리하고 이후 비빈의 간택에 까지 관여 성종대 도입되어 임란을 거치며 최고기구로 성장후 흥선대원군이 혁파 의정부가 수행한 국정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1400년부터 1592년 사이에는 대체로 형정(刑政)·노비·경제·군사·의례·복제(服制)·입법·시무조진(時務條陳)·인사·교육·과거·풍속·부역(赴役)·축성·진휼(賑恤)·구료(救療)·사행(使行)·통교·불교·국도경영(國都經營)·진봉(進封)·공신책록·역사편찬 등의 모든 국사에 참여하였으나, 1592년부터 1864년 사이에는 비변사가 육조 등을 지휘하면서 정치·군사·외교 등 모든 국정을 관장하였으므로 이음양(理陰陽)과 관련된 여러 의례(儀禮)을 담당함에 그쳤다. 5위 도총부는 인조 이후 점진적으로 5군영 체제로 전환되며, 정조대 장용영이 설치되나, 순조대에 폐지됨 3사(三司) 홍문관:經書관리 사헌부:관리감찰 사간원:간쟁과 논박 각 도의 감영에는 관찰사가 주재하여 각 감영의 군사를 통솔하며, 진관 체제에서 조선중기 제승방략의 체제조 전환함 조선시대 중앙관제 비변사

  9. 조선시대 지방관제

  10. 이 고 지도는 1832년 Paris에서 발행된 J. Klaproth의 불어본(佛語本)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 SAN KOKF TSOU RAN TO SETS OU APERCU GENERAL DES TROIS ROYAUMES)의 부록으로 나온 지도로, 일본인 하야시(林子平)가 1785년 발행한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之圖)를 불어(佛語)로 서양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공헌했다. 위도(緯度)는 북위 35도에서 44도까지 표시되어 있으나 경도(經度)는 표시되지 않았다. 북위 39도의 Kiang Ling(강릉) 동쪽 바다에 있는 큰 섬을 “Thsian Chan Koue ou Tyu Ling Tao”라고 했다. 조선(朝鮮)의 팔도(八道)가 PHING NGAN(평안), HIAN KING(함경), HOUANG HAI(황해), KIANG YUAN(강원), KING KI(경기), TCHOUNG THSING(충청), KING CHANG(경상), THSIUAN LO(전라) 등으로 표기(表記)되어 있다.

  11. 조선 지방관제의 특징 1. 역사상 처음으로 철저한 군현제도의 실시 - 고려시대 다원적 지방제도를 팔도관찰사제로 일원화 2. 조선시대의 주·부·군·현 등 지방행정구획의 차등은 취락의 대소, 인구의 다과, 전결(田結)의 크기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통례였으나, 상벌적 (賞罰的)인 성격의 명호 변경도 없지 않았다. - 이것은 읍호가 행정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권력에 의해서 정치적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 3. 관찰사·수령 등 모든 지방관에 대한 통제책이 마련 - 관찰사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고 본향, 전답 소유지, 친인척이 수령으로 부임한 곳에는 부임하는 것을 금지하여 토착세력화 방지 4. 토착세력인 향리에 대한 견제와 포상의 대책마련 - 비리에 대한 엄벌과 소과 합격/군공이 있을 경우 잡역의 면제 조선의 지방제도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집권층의 의지가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조선의 지방제도는 시기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의 변경은 있었지만, 그 기본원칙은 말기까지 지켜지고 있었다.

  12. 동지 돈령부사 심회가 위장으로서 입시하니, 임금이 그로 하여금 앞으로 나오게 하고는 말하기를 ‘위장은 공기니 욕되게 할 수는 없다. 경은 그것을 경계하라’하니 심회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례 하였다.임금이 또 말하기를 ‘다만 위장만이 공기가 될 뿐 아니라 내 직위도 또한 공기이고, 사직도 또한 천하 만세의 공기이다. 나는 응당 이 공기를 받을 사람인 까닭으로 이를 받았을 뿐이니 이를 사유로 볼 수 없다. - 世祖實錄 卷七 世祖 3年 12월 新柳 - 조선시대 관제의 특징 文官職 武官職 무관 최고관직은 오위도총관 그러나, 3정승에 의한 겸직 실질적 최고 품계는 종2품 각道 병영의 병마절도사 최고 관직 정1품 (영의정,우의정,좌의정) 6조의 장관직 (각 조의 정2품 판서) 이외 각부의 장은 문관이 兼 • 조선의 왕위는 民에 군림하는 위치가 아닌 유교관료의 대표인 재상의 보좌를 받아 인정과 덕치를 배풀 자격자로서 인식되고 있다. • 조선시대의 관직은 公器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세조실록 7권) • 의정부, 6조, 3사와 같은 공식적 행정기구가 존재하였지만, 돈녕부, 종친부등 왕실예우관련 4부의 종친, 인척, 공신 등이 공식기구를 능가하는 정치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조선은 고도로 발달된 관료지배체제 국가로 정의되기도 하지만 가산국가적인 속성도 어느정도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 1627년/1637년 2차의 여진의 침입 1592~98년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직후 兩亂 조선 전반에 걸친 사회-경제 시스템 혼란 왜란 이후의 상황에 대한 일련의 복고적 반동 출현 동양 삼국이 동원된 국제전 성격 소중화 의식 강화 외부 세계에 대한 자각 조선의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倭亂과 胡亂은 건국 이후 유지되어온 국가시스템을 크게 동요시키고, 조선의 治子와 일반백성들의 인식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 조선의 전환기 “兩亂”

  14. 양란의 영향 사회신분제 동요 신분과 경제력의 분화 교조주의 복고주의 조선 내적인 영향 외부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새로운 것들의 등장

  15. 양란의 영향 일본사회의 재편 대륙의 역학관계 변동 동아시아 평화기도래 조선 외적인 영향 신문물의 급속한 유통 (일본) 새로운 학문성향 대두

  16. 국역 부담에 따라 법적으로 양천제로 구분 양인에는 평민만이 아니라 위로는 문무 관리로부터 아래로는 신량역천(身良役賤)에 이르는 모든 비노비자가 포괄되는 개념 공권력에 의한 신체·생명의 보호라는 기본권에서 양인은 자유인이며 공민(公民)으로서 기본권의 보장 벼슬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어 있었으나, 권리가 박탈되거나 제한된 자가 다수 존재 양인을 제외한 모든 계층 노비에 대한 공권력의 보호는 소유주에 의한 임의적인 형벌만을 제한하는 소극적인 형태였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노비는 양인보다 한 등급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 벼슬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원천적으로 박탈 양인과 달리 남녀 모두 부역의 대상이며, 조선조 종부법에서 후기 종모법으로 변화 조선시대 사회 신분제

  17. 성리학에 입각한 사회적 교화의 의무가 주어진 사회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기득권층 유학에 있어서 사람의 등급을 나누는 전통은 孔子부터 유래 되어 성리학 단계에 이르러 이기론을 바탕으로 기의 맑고, 탁함의 정도에 따라 혹은 邪氣나 正氣냐에 따라 사람의 우열이 결정되고, 그 우열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고 보았다. 퇴계 이황 역시 사람을 3가지로 구분하였는데, 가장 맑은 氣를 가진 사람을 上知, 중간 정도의 氣를 가진 사람을 中人, 그리고 가장 탁한 氣를 가진 사람을 下愚로 구분하였다. 그래서 가장 맑은 氣를 가지고 태어나 지혜와 행동을 갖춘 사람(上知)이 지혜는 뛰어나나 행동이 부족하거나(中人), 우둔한 사람(下愚)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上知는 양반 사대부를 의미하고, 中人, 下愚는 평천민을 의미하게 되는데, 사회적으로 양반이 평천민의 지배를 정당화 하거나, 경제적으로 양반 지주가 평천민의 소작인에 대한 경제적 차별과 지배-피지배 관계가 정당화 되는것이다. 양반 지방 향리 및 토관의 일정 이상의 학문-재산을 축적한 계층 조선 후기부터 서얼을 지칭 중인 자유민이며 공민(公民), 국가에 의한 국역부담의 의무와 관직 진출의 권리부여 평민 사적 소유의 대상인 노비를 지칭 일천즉천의 원칙으로 부모중 노비가 있으면 노비로 간주 천민 조선시대 사회 신분제

  18. 사(士) 농(農) 공(工) 상(商) 조선시대 경제활동 관리를 포함한 지식계층으로 토지를 소유한 지주이며, 관직 진출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는 지배계급 농업 생산의 근간 이자, 국가의 각종 부세의 주요하고, 기본적인 부담자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 까지 폭 넓게 분포한다. 직접적 노동이 아닌 물건의 유통과 점유 를 통한 금전에 집착 으로 매우 천시함 역관출신이 많으며, 후기 상공업 발달로 상단과 도고의 성장 공장안에 등록되어 국가에 의한 직접적 통제를 받으며 농민 보다 더욱 천시됨 후기 상공업의 발달 로 인하여 점차성장 노심자(勞心者 : 정신노동자)가 치자(治者)가 되고 노력자(勞力者 : 육체노동자)가 피치자가 되는 원리에 의해 사(士)가 가장 상위에 해당된다. 그리고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농(農)이 그 다음이요, 또 다른 생산인 공(工)이 그 다음이고 그에서 이익을 취하는 상(商)이 가장 말업(末業)이다.

  19. 양란 이후 급성장 유교적 현실을 재현 작자 미상의 작품 다수 고려에 비해 소박 해학적이고 풍자적 관념적이고 이상적 민화, 풍속화, 판소리 시조, 백자, 사군자 조선시대 문화

  20. 조선백자 고려청자

  21. 18세기 초인 숙종에서 영조(1674-1776)대에 발생하여 중기에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나 그 기원의 원류는 삼국시대에 까지 소급되어지기도 한다. 판소리는 순수한 우리 음악이자 모든 예술의 결집체인 종합예술로서, 빼어난 문학적 요소와 사회적 풍습과 문화 및 해학적인 내용에 자연의 소리와 그 이치에 맞는 잘 다듬어진 우리소리를 붙여 만들어 놓은 독특한 우리민족의 음악이며, 자연의 이치와 인간이 지켜야 할 삼강오륜의 도덕을 일깨워주고 사람 도리를 다하며 살아가는 교훈을 주는 철학적 음악이기도 하다판소리라고 부른 것은 60년대 후반의 일이고 그전에는 소리, 창악, 창, 창극조라고 칭하였으며,소리를 하면서 판을 벌려보자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판은 여러 사람이 합류하여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동편제: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순창·곡성·구례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서, 가왕으로 일컬어지는 운봉 출신의 송흥록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우조(씩씩한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감정을 가능한 절제하며, 장단은 '대마디 대장단'을 사용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발성은 통성을 사용하여 엄하게 하며, 구절 끝마침을 되게 끊어낸다. 서편제: 섬진강 서쪽 지역인 광주·나주·담양·화순·보성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 순창 출신이며 보성에서 말년을 보낸 박유전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계면조(슬픈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며, 발성의 기교를 중시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 소리가 늘어지는 특징을 지니며, 장단의 운용 면에서는 엇부침이라하여, 매우 기교적인 리듬을 구사한다. 또한 발림(육체적 표현. 동작)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중고제: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전승된 소리로, 송흥록과 동시대 사람인 강경 출신 김성옥으로부터 출발되었다. 음악적 특색은 비동비서(非東非西), 혹은 동·서편의 중간인데, 일제강점기 이후 전승이 끊어졌다.

  22. 봉산탈춤은 예로부터 황해도 등지에서 추어오던 '해서 탈춤'의 대표격으로, 그 극본과 춤 가면, 의상 및 반주음악에 있어 한국 가면무극의 해서형의 특징을 잘 지니고 있으며 역시 다른 가면무극과 마찬가지로 춤이 주가되고 이에 몸짓, 동작, 재담과 노래가 따르는 형식이다. 중부지방의 양주별산대놀이에 비하면 그 춤은 뛰는 춤이 많아 활발하며 대륙 전래의 건무의 영향을 생각케 한다. 가면 역시 보다 사실적인 수법으로 특이하다. 그 과장을 크게 7과장으로 나누어 제1과장 사상좌춤, 제2과장 팔목중춤,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신장수, 취발이춤 포함),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 말뚝이춤, 제7과장 미얄 영감춤을 이 놀이의 내용 역시 산대도감 계통극으로서 다른 가면극과 거의 동일한 주제를 갖고 있다. 파계승, 몰락한 양반과 그 하인, 무당,사당거사와 기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무속과 불교 신앙과 권선징악의 테두리 안에서 호색과 현실 폭로의 익살과 웃음을 통하여 이상의 주제를 극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놀이는 이북지방의 큰 명절인 단오날 주로 연희되었으며 사상좌춤으로 시작하여 굿으로 끝나고 있으나 다른 가면극에 비하여 신앙적 내지는 종교적 의의는 희박하고 민중의 오락적 요소가 훨씬 우세하다.

  23. 조선 초기의 화가 강희안(姜希顔)이 그린 산수인물화.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23.4㎝, 가로 1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의 왼편 가장자리 상단부에 ‘仁齋(인재)’라는 그의 호를 새긴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다. 이 그림은 덩굴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에 두고 바위에 기대어 엎드린 자세로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중국 북송대(北宋代) 회화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안견파(安堅派) 화풍이 크게 풍미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색다른 경향의 화풍을 보이고 있다 하겠다. 산수의 조그마한 한 부분을 배경으로 한 인물 중심의 구성이라든가 근경 위주의 대담한 변각 구도(邊角構圖)와 공간감의 결여 등은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계(浙派系) 소경산수인물 (小景山水人物) 화풍의 선구적인 요소로 간주된다. 高士觀水圖

  24. 정선은 금강산과 영남 지방 및 서울 근교 일대를 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토대로 표현하여 새로운 화격을 이룩함으로써 전통 실경 산수화의 면모를 일신하고, 진경 산수화풍의 정형을 수립하였다. 그의 진경 화풍은 기존 화법과 남종화법을 우리 산천의 형상에 어울리는 필법으로 소화하여 낸 것이다.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하여 경관에서 받은 감흥과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하였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내추용연” <金剛全圖> 中 ”내추용연”

  25. 蓮塘野遊 -廳琴賞蓮

  26. 한국 민화에는 순수함·소박함·단순함·솔직함·직접성·무명성·대중성·동일 주제의 반복과 실용성·비창조성·생활 습속과의 연계성 등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27. 어 줘 서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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