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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2 .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2. 수동적(受動的) 밤. 수동적(受動的) 밤. 이제 정화에 있어서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부분 , 즉 수동적 정화에 대해 살펴 보려 한다 .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칠죄종 ( 七罪宗 )을 중심으로 초심자들의 불완전을 다루고 , 인간이 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손을 쓰시지 않는 이상 온전히 정화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 인간 편에서 자신의 불결함과 불완전을 벗어나기 위해 나름으로 해야 할 바를 충실하게 이행할 때 , 하느님께서 정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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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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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ation Transcript


  1.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2. 수동적(受動的) 밤

  2. 수동적(受動的) 밤 • 이제 정화에 있어서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부분, 즉 수동적 정화에 대해 살펴 보려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칠죄종(七罪宗)을 중심으로 초심자들의 불완전을 다루고, 인간이 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손을 쓰시지 않는 이상 온전히 정화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인간 편에서 자신의 불결함과 불완전을 벗어나기 위해 나름으로 해야 할 바를 충실하게 이행할 때, 하느님께서 정화의 손길을 펼치시어 인간의 노력에 응답해 주신다. 그러나 이 응답은 결코 달콤하거나 감미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영혼 안에 재현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영혼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칠죄종(七罪宗) • 죄원(罪源)으로서칠죄종이 있다. 여기서 죄종(罪宗)이란 다른 죄의 근원이 되는 죄로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다른 죄를 유발하는 원인이 됨을 말한다. 즉, 교오(驕傲: 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업신여김), 간린(慳吝: 하는 짓이 소심하고 인색함), 미색(迷色: 성욕의 노예가 되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함), 분노(憤怒: 분에 겨워 몹시 화를 냄), 탐도(貪饕: 음식이나 재물을 탐하여 지나칠 정도로 먹고 마심), 질투(嫉妬: 우월한 사람을 시기함), 나태(懶怠: 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함)이다.

  4. 수동적 정화(淨化)의 필요성(必要性) • 십자가 성 요한은 하느님이 수동적인 방법으로 영혼에게 손을 쓰시지 않는 이상 영혼이 아무리 힘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자신의 불완전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손수 영혼을 기르시고 먹이시므로 영혼은 어느 능동적 협력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밤은 하느님 사랑의 영묘한 합일에 옮기기 위하여 훨씬 중요한 영의 밤에 들어갈 사람에게는(모든 사람이 다 옮기는 게 아니라 소수만이 들어가기에) 대단한 고생과 감각적인 시련을 수반하는 것이 보통인데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그 기간을 오래 끄는 것이다.

  5. 이 밤을 통하여 감성이 끊기고 그 욕정은 식고 모든 욕(慾)이 잠들어 고요해지면, 영혼은 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영의 길이란 진보한 사람의 길을 말하는데, 이것을 달리 조명(照明)의 길(Via purgativa) 혹은 주부적 관상(注賦的 觀想, Contemplatioinfusa)의 길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손수 영혼을 기르시고먹이시므로 영혼은 어떠한 능동적 협력도 하지 않는 것이다.

  6. 감각(感覺)의 정화(淨化) • 감각의 수동적 밤은 이미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이루어진 상태라 하겠다. 그러나 감각의 능동적 밤과 수동적인 밤이 동시에 작용하지 않으면 정화의 효과를 낼 수 없다. 또한 영의 밤들도 어떤 의미에서 동시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도권을 취할 때 영혼은 순종해야 하며, 영혼에 의해 실현되는 능동적 밤은 수동적 밤에 조절되어야 하고그 리듬에 맞추어야 하며 그 요구에 응해야 한다.

  7. 초심자(初心者)들의 불완전(不完全) • 제 뜻, 제 재미가 없는 일이면 하느님의 뜻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제 마음이 흡족하면 하느님도 좋아하시리라 믿으니 결국 하느님을 가지고 자기를 측량함이 아니라, 자기를 가지고 하느님을 측량하는 것이다. • 하느님은 거기서 재미와 맛의 젖을 떼게 하시고 온전한 메마름과 내적 암흑 속에다 그들을 두시어 제 멋대로인 그들의 어린 놀이를 말끔히 없애심으로써 아주 다른 법으로 덕을 닦도록 마련하신다. 왜냐하면 초심자가 제 아무리 스스로를 절제하고 하는 일, 당하는 일을 바로잡아나간다 해도, 하느님께서 이 밤의 정화를 통하여 그 사람이 수동적이 되도록 붙들어 주시지 않는 이상, 다는 물론 조금도 무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8. 기도(祈禱)의 위기(危機) • 이 수동적 정화는 피조물(被造物)에 대한 애착(愛着)이 주는 마지막 위로까지 거두어 가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미건조(無味乾燥)함이며 견디기 힘든 시련이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영혼으로 하여금 피조물이 주는 위로에서 벗어나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수동적 정화로 감각 욕을 씻어 닦게 하시므로 영혼은 하느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피조물에서도 아무런 낙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9. 이때부터 관상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 관상으로 인해 영혼은 그전처럼 상상의 감각으로 묵상(默想)이나 추리(推理)를 하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주시기 시작하지만, 그전처럼 감각을 통하지 않고 순수 영을 통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한번 이 정화로 들어가게 되면 앞으로는 항상 정신 능력을 가지고 추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10. 정화(淨化)의 고통(苦痛) • 감성의 밤-하느님께서 영혼을 감성의 생활에서 영성의 생활, 즉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주셔서 영혼은 제 능력으로 하느님 일을 추리할 수조차 없게 되는- 그러한 밤의 메마름에서 영성인들이 큰 고생을 하게 마련인데 메마름만이 아니라 길을 잃은 듯한 걱정 때문에 그들은 좋은 일에 맛이나 멋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셨구나, 영혼의 복이 다했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활동하기보다는 차라리 무위 속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능동적 활동(묵상과 추리)은 오히려 고요와 화평 속에 있던 영마저 잃어버리게 하므로 꾸준히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인내해야 한다.

  11. 이때는 영혼을 정적 속에다 버려두어야 할 때이며, 관상은 묵상과 추리에 속하지 않는 까닭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과 사색에서 영혼을 해방시켜서 자유분방하게 만들어서 다만 하느님 안의 고요하고 사랑 겨운 지견에 만족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의지도 욕망도 갖지 말아야 한다. 영혼은 모든 능력의 활동이 멈추어야만 하느님께서 그에게 내리시는 관상(注賦的 觀想)을 고요한 가운데 풍요롭게 받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 어둡고 은밀한 관상이 이바지 하는 사랑이 영 안에서 불붙게 된다. 관상이란 하느님의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 겨운 내리심인 까닭이다.

  12. 감각의 밤을 지내는 동안 영혼은 다음과 같은 행동 양식을 준수해야 한다. 1)하느님이 정하시는 기간에 고통스러운 시련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의탁할 것. 2)고뇌 중에서도 더 열렬히 기도하신 게쎄마니 동산의 그리스도(루카22, 43)를 본받아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기도에 항구함. 3)영혼은 평화와 고요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별다른 생각 없이 또 기쁨이나 감정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이 단순히 사랑스런 눈길로 하느님을 응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13. 중요한 이익과 열매들 • 첫째, 자기와 자기 비참(悲慘)에 대한 지견을 얻게 된다. 이 지견은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내리시는 은혜에 항상 함께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전의 풍요를 느끼던 정신 능력이 메마르고 허전하며 선행에 곤란을 발견하는 데서 얻는 것이다. 이 지견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모심에 있어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게 된다. 둘째, 하느님의 영혼의 비추심으로부터 알게 된 낮추어진 자아 인식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초월하심에 대한 인식을 얻게된다. 감성의 욕구와 맛의 도움이 사라진 다음이면 지성은 진리를 파악함에 있어 맑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알기 위한 준비와 방법은 감성면의 메마름과 끊음인 것이다.

  14. 셋째, 낮아진 자아인식을 통하여 얻어진 영성적 겸손이다. 이 영성적 겸손으로 인하여 제일 죄원(罪源)인 영적 교만의 악습에서 벗어나 불완전을 씻을 수 있게 되며, 이웃사랑이 충만하고 영성의 길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영혼은 영적인 탐욕(貪慾), 사음(邪淫), 탐식(貪食)의 불완전한 결점과 분노(憤怒)와 질투(嫉妬)와 나태(懶怠)에서 해방하게 한다. 그 결과 영혼은 평화(平和)와 고요(古謠), 하느님을 꾸준히 기억하고 두려워함, 영혼의 깨끗해짐과 모든 덕(德)-대신덕(對神德), 사추덕(四樞德), 윤리덕(倫理德)-을 닦게 된다. 이 외에도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이익, 즉 영의 맛스러움과 순수한 사랑, 영의 지견, 때로는 미묘한 지견까지 내리신다.

  15.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모양으로 똑같은 시련이 오지 않을 뿐 아니라 각자가 지닌 불완전의 정도에 따라 정확하게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께서 합일에까지 올려주시려는 영혼의 사랑에 따라서 시간을 길게 짧게 혹은 정도를 높이거나 낮추시면서 영혼을 짓부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감각의 수동적 밤의 길이와 정도가 영혼의 상태에 따라 상이(相異)하더라도 ‘빛과 어둠의 기간이 교차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교차는 전이(轉移)의 단계와 영의 수동적인 밤에서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또 감각의 수동적 밤은 완전한 조명의 길로 넘어가는 하나의 과도기적 단계라는 것도 알 수 있다.

  16. 전이(轉移)의 단계(段階) • 나아간 사람들이 지니는 불완전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습성적(習性的)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것이다. 습성적인 불완전은 애착과 불완전한 습성으로서 미처 감성의 정화가 이르지 못한 영안에 아직 뿌리처럼 남아 있는 그것이다. 감성의 수동적 정화는 다만 관상의 문과 시초로서 감성을 영에 적응시키는데 불과하므로 ‘정화’보다는 차라리 ‘욕(慾)의 혁신(革新)이나 제어(制御)’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습성적인 불완전은 영의 밤을 통과해야만 온전히 씻어지게 된다. 그리고 현실적인 불완전(본성의 애착)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개는 감성과 영성을 통한 영스러운 통교 및 지각을 얻는데서 비롯된다.

  17. 이 단계에서는 상상 및 영의 시현(示現)과 통교(通交)가 이루어지고 감성이 여기에 참여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악마나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유혹들이 오게 된다. 영혼이 조심성이나 두려움 없이 그러한 지각이나 맛에 집착하게 되면 교만(驕慢)과 허영(虛榮)에 이끌려 모든 덕의 열쇠요 수호자인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마저 잃게 된다. 이와 같이 감성이 영적 통교에 참여함으로써 강렬하고 영스러운 통교가 이루어 질 수 없으나(감성의 취약성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이 영에 적응하고 합쳐져서 준엄하고도 가혹한 영의 정화를 당해내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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