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likes | 546 Views
군인 , 정치인 , 언론인 , 민족주의자 장준하 (張俊河). < 언론사상사 TEAM 9> 박민 , 우뢰 , 윤유진 , 이승현 , 임슬기 , 이가람. 목차. 장준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 군인으로서의 장준하 민족주의자로서의 장준하 기독교인으로서의 장준하 언론인으로서의 장준하 정치인으로서의 장준하 수수께끼의 죽음 그가 남긴 것. 장준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 군인으로서의 장준하. 1944 년 7 월 7 일 , 광복군이 되기 위해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 .
E N D
군인, 정치인, 언론인, 민족주의자장준하 (張俊河) <언론사상사 TEAM 9> 박민, 우뢰, 윤유진, 이승현, 임슬기, 이가람
목차 • 장준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 군인으로서의 장준하 • 민족주의자로서의 장준하 • 기독교인으로서의 장준하 • 언론인으로서의 장준하 • 정치인으로서의 장준하 • 수수께끼의 죽음 • 그가 남긴 것 언론사상사 TEAM 9
장준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언론사상사 TEAM 9
군인으로서의 장준하 • 1944년 7월 7일,광복군이 되기 위해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 • 산 넘고 물 건너,임천 광복군 훈련소에 도착. 3개월간 훈련.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 언론사상사 TEAM 9
군인으로서의 장준하 • 임천 광복군 훈련소의 열악한 환경에 실망, 행동하는 독립운동열망. • 50여명의 동지를 규합해 충칭 임시정부까지 6천리 장정 결심. 2,356Km 엄마 독립 찾아 6천리 언론사상사 TEAM 9
군인으로서의 장준하 • 충칭 임시정부 도착.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들의 극심한 파벌싸움에 또 한 번 실망. • 미국의 OSS (전략 첩보대) 특수 훈련 지원. 3개월간 훈련 수료. 계속되는 좌절 불사신의 사나이 언론사상사 TEAM 9
군인으로서의 장준하 • 한국 잠입 작전을실행하기 직전에일본 완전 항복.작전 백지화. • 1945년 11월 23일,임시정부 요인으로그리운 고국에 귀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타이밍 언론사상사 TEAM 9
군인으로서의 장준하 언론사상사 TEAM 9
민족주의자로서의 장준하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민족주의의 정수 언론사상사 TEAM 9
기독교인으로서의 장준하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천주교 묘지에 묻혀 계신 장준하 선생. 목숨이 오고 가는 순간에도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렸을 만큼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생전에는 ‘장 목사’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언론사상사 TEAM 9
들판 속의 돌베개 그의 유일한 저서이기도 한 책의 제목은 『돌베개』. 성서에 등장하는 야곱의 돌베개를 생존의 암호로 사용할 만큼, 장준하의 인생에서 신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했다. 언론사상사 TEAM 9
언론인으로서의 장준하 • 기록에 관심이 많았던 청년. • 인물이나 사건의 파악, 분석에도 재주를 보였다. • 계몽사상의 흔적. • 잡지 편집인으로서의 재능. 언론사상사 TEAM 9
언론인으로서의 장준하 • 장준하의 첫 잡지『등불』 • 시, 단편, 수필, 희곡, 만화 등 볼거리 풍부. • 1호는 2부, 2호는 단 1부밖에 만들지 못함. 언론사상사 TEAM 9
언론인으로서의 장준하 • 두 번째로 만든 잡지『제단 (祭壇)』 • OSS 특수요원 훈련 중에 계획, 편집, 제작. • 1호는 300부, 2호는 350부 가량 발행. 언론사상사 TEAM 9
그가 펴낸 세 번째 잡지는 월간지인『사상』이었다. 6.25 중에 창간되어 처음에는 문교부의 기관지였으나, 1953년 4월 장준하가 이를 인수하여 『사상계』로 개명, 본격적인 종합 교양지로서 다시 만들어졌다. 언론인으로서의 장준하 『사상계 (思想界)』 1953.4 ~ 1970.5 언론사상사 TEAM 9
“제가 잡지를 시작할 때는, 에.. 제가 무슨 돈이 있어가지고 시작한 게 아니니까요. 그래 사무실도 없고 직원도 저 혼자고, 간혹 가다가 제 집에.. 아내가 교정을 보는 것을 좀 도와줄 정도였었구요. 모든 것을 다 빈 손 가지고 시작하니까 에… 참 한심했었죠. 큰 가방 속에다가 원고 보따리 전부 넣고 다니고, 교정 보따리도 넣고 다니면서, 내가 그 가방을 열어 놓으면 그게 바로 내 사무실이었었구요.” 언론인으로서의 장준하 『사상계 (思想界)』 1953.4 ~ 1970.5 언론사상사 TEAM 9
사상계 (思想界) • 문예활동의 본산. 동인문학상 창시. • 필진은 김준엽, 최석채 등 당대의 지성들로 가득. • 2000년에는 CD-ROM으로복원되기도. • 전성기에는 발행부수 5만 ~ 8만. 언론사상사 TEAM 9
국회의원 시절의 장준하 선생 (오른쪽) 정치인으로서의 장준하 장준하는 주로 주먹이 아닌 펜으로 싸우는 언론인이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가로서 이승만 – 이기붕의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박정희의 유신 또한 그의 비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언론사상사 TEAM 9
협정문서에 사인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한일 협정 : 1965.6.22 현재까지 한일 관계의 기본이 되는 조약이다. 어업과 청구권에 대해서 우리가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비판과, 정신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변명거리를 제공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언론사상사 TEAM 9
국회의원 장준하 정치인으로서의 장준하에게 있어서 가장 빛났던 시기라면 역시제7대 총선이다. 국가원수 모독죄라는 이유로 구속된 몸임에도 사람들은 그를 지지했고, 신뢰했다. 결국 그는 옥중 당선이라는 일생일대의 쾌거를 이루어내고 만다. 언론사상사 TEAM 9
장준하와 박정희 •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한 독립군 출신. • 민주주의의 등불 • 철저한 비주류계 인사 • 펜으로 싸우는 언론인 • 일본군에 자원 입대. 광복 후 국군으로 갈아탐. • 일인독재의 화신 • 대한민국 최강자 • 표현의 자유를 무시 비교체험 극과 극 장준하 박정희 언론사상사 TEAM 9
수수께끼의 죽음 등산을 좋아했던 장준하는 사망 당일에도 산에 올랐다. 그의 사인은 실족사 (失足死)였으나, 공교롭게도 시신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산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져 죽은 시신으로 보기엔 너무나도 이상했다. 언론사상사 TEAM 9
그가 남긴 것 •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오점 없는 인생 • 독립군 출신, 항일운동가, 민족주의자언론인 • 정치적으로도 깨끗한 편, 민주주의의 꺼지지 않는 등불 • 동인문학상, 구국장정 6천리 캠페인, 청년 장준하 • 드라마틱한 여정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줌 • 문인들의 등용문 제공, 6천리 여정은 뮤지컬로도 제작 • 문익환 목사 등 민주화 투사들에게 큰 영향 • 문익환 “나는 장준하의 대타(代打)다.” • 재야(在野)의 기틀을 마련 언론사상사 TEAM 9
정리 • 군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인물. • 오늘날 우리가 정권을 비판하고, 권력을 풍자하고, 부패에 분노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은 4.19와 5.18, 그리고 장준하와 같은 선구자들의 공이다. • 정치인, 언론인에게서 도덕과 윤리의 파편조차희박해져 가는 요즘더욱 그리워지는 인물. 언론사상사 TEAM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