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likes | 370 Views
바울의 종말론. 1. 바울 종말론의 구조. 종말론이란 “ 마지막에 되어질 일들에 관한 교의 ” 이다 . 이는 종교적으로 세상의 진행 과정이 명확한 종국적 목표를 향해 가며 , 그 이후에는 새로운 사물의 질서가 수립될 것인데 , 그 상태는 더 이상 변하지 않 고 영원의 정적인 성격을 지닐 것이라는 것을 함의하는 그런 가르침이나 신념을 다루는 것이다 . (p.13)
E N D
바울의 종말론 1. 바울 종말론의 구조
종말론이란 “마지막에 되어질 일들에 관한 교의”이다. 이는 종교적으로 세상의 진행 과정이 명확한 종국적 목표를 향해 가며, 그 이후에는 새로운 사물의 질서가 수립될 것인데, 그 상태는 더 이상 변하지 않고 영원의 정적인 성격을 지닐 것이라는 것을 함의하는 그런 가르침이나 신념을 다루는 것이다. (p.13) • אַחֲרִית가 시간에 적용될 때 이것이 순전히 연대기적인 지칭인지, 아니면 “결과로 나타나는 것”, 혹은 “계속적 과정의 목표”라는 개념과 같이 그것에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하는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p.14)
첫째로, 이 어구는 명확히 종말론의 영역에 속한다. 이는 어떤 무한히 계속되는 점이나 기간, 또는 사건의 연속을 지칭하지 않는다. 획기적 종극성(epochal finality)이라는 특징이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대적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과 혼동되거나 섞여서는 안 된다. 이 ‘아헤리트’를 일종의 가변적 복합체, 즉 선지적 이상의 선(線)을 따라 진전해 나아갈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구약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p.18) • 둘째로, 이 개념은 종말론의 집합적 측면과 관련된다. 즉 이는 개인의 장래나 미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미래와 그 운명을 다루는 것이다. (p.19)
셋째로, 이 개념은 그 범위에 있어서 상당한 탄력성을 가지고 있다. 또 그 위치에 있어서도 상당히 가변성을 갖는다. 중요한 문제는 정적인 결과, 즉 예언된 ‘영원한 지복의 상태’가 이 ‘아헤리트’ 안에 실제로 포함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p.20) • 히브리 성경에서는 ‘아헤리트’를 일련의 역경의 기간으로 나타내고 있다. 신명기 4:30에서 ‘지복의 시대’가 ‘아헤리트’에 속한다고 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 이 구절이 ‘아헤리트’에 속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회심(conversion)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p.20) • 호세아 3:5에서도 백성들이 여호와께 나아오는 것, 그리고 그의 선함(은총)에로 나아오는 것이 ‘아헤리트’에 속하는 것으로 언급되어져 있다. (p.20-21)
그러나여기서 만일 “그의 은총(선함)으로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을 즐긴다는 함축성 있고 풍성한 의미로 이해하면, ‘아헤리트’가 그로부터 결과하는 영원한 종말론적 상태를 포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된다. ‘아헤리트’의 극치에 이른 종말론적 상태를 놓는 유일한 말씀은 이사야 2:2과 미가서4:1의 두 번 반복된 동일한 예언의 말씀이다. (p.21) • 이런신학 용법의 특징은 이 어구를 쓰는 이나 독자들이 그 마지막 날들이 그들에게 닥쳐있다고, 최소한 가까이왔다고 의식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는 데에 있다. 사실, 이제는 더 이상 현재를 미래로부터 구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런 개념이 이 어구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p.22)
바울의 이 어구를 사용한 용법을 살펴보면, 그의 용어는 여기에 ‘마지막 개념’을 붙이는 것과는 다른 정향을 가지고 있음이 곧 명백해진다. (p.25) • 구약의관점과는 달리 바울 종말론의 구조는 대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즉 마지막을 이전에 있는 포괄적 규범의 원칙과는 반대되는 또 하나의 포괄적인 원칙 아래 배치한다.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이 중심이 되고, 이 핵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p.26)
‘세대’라는 용어와 관련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이 대조 일반의 기원과 그 고대성에 대한 문제이다. 둘째 문제는 ‘세대’가 ‘코스모스’와 어떤 관련을 지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p.29) • 일정한 기간으로 정해진 성격과 현재 사물의 질서가 암시적으로만 지속한다는 개념이 “세대”란 말에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이 시간적 범주로부터 세계라는 의미의 범주로 옮겨가는 성향이 있다면 말이다. 이로부터 “세대”(age)와 “세계”(world)는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서 둘이 모두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게 되었다. (p.35) • 원래 ‘아이온’은 순전한 시간 개념이었는데, 그것이 포괄적으로 사용되어 공간 개념까지 갖게 되었다. (p.36)
전체적으로 말해서, 세계 구조(world-scheme)가 시간 구조(time-scheme)를 따른다고는 말할 수 있으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바울이 세상을 악하다고 보는 그 개념을 해석함에 있어서 신학적 중요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p.45) • 우리는 바울이 유대교 신학이나 묵시 문학에서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구별을 빌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런데 유대교 신학과 묵시 문학에서 두 세대론은 분명히 연속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이가 바울 이전에 유대교에 이런 두 세대론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부인한다고 해도, 이 두 세대론에 명백히 속해 있는 연속성은 곧 후대에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p.47)
종말론은가장 강력한 극적인 실재론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드라마인데, 그것도 대단원과 절정으로 몰아가는 드라마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바울의 가장 실천적인 종교적 관심에 관여하여 ‘기독교 신앙의 구조’에 관한 그의 이론적 관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p.48) • 우리는바울의 기독론만이 아니라, 그의 구원론에 대한 가르침도 종말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져 있어서, 어떤 것이 더 중심적이고 어떤 것이 지엽적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종말론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심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음을 밝혀보려고 한다. (p.50)
바울의종교적 심성이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서신들에서 “희망”(혹은 “소망”) 개념이 차지하는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p.51) • 소망하는마음의 상태가 깊은 감정과 ‘삶의 관심’으로서의 강한 관심의 집중을 동반함이 고린도전서15:19에 잘 표현되어져 있다. (p.54) • 결국 이점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파루시아의 가까움에 대한 의심할 여지없는 확실한 기대이다. 그리고 그 기대와 바람은 바울 자신의 의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p.56) • 이것은 분명히 단순히 연대기적인 사료가 아닌 것이다. (p.57)
‘비관주의’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원칙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사실 그 말은 종말론적 개념과 개념상의 모순을 일으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과정의 결과에 대해서는 바울의 마음에 무조건적인 최상의 낙관론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58) • 또한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개념 자체가 영지주의적 사변의 증후인 한정적 비관론과는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 사상의 구조 내에서 절대적 비관주의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싸르크스’(σάρξ)(육체) 개념관만 관련하여 찾아볼 수 있다. (p.58)
바울이 존재의 두 단계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그는 ‘싸르크스’에 대해 말하기를 회피한다. 이 소위 비관주의의 참된 근원은 사실 바울의 엄격하고도 포괄적인 ‘죄에 대한 감각’에 있다. 종말론적 구출과 관련하여 소망의 사상을 향해서만 달려가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죄의 부담스럽고 억압적인 세력이다. 또한 오직 미래만을 향해 달려가도록 된 것은 바울과 초대교회 전체가 혹독한 박해 가운데서 경험한 이 세상의 적의 때문에 더 재촉되었다는 것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p.58-59) • 이제까지 우리는 사도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가 연속적인 계획에 근거해 있음을 고찰하였다. (p.60) • 이렇게 얻어진 새로운 관점은 “반-종말론적”(semi-eschatological)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p.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