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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맥 9 ( 분열왕국시대 2 : 남유다 ).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에 비해 경제나 군사적인 면에서 열세였다 . 그러나 다윗계약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어 다윗왕조는 주전 587 년 유다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 주전 1000-587 년 , 예외 : 아합의 딸 아달랴가 5 년간 통치 ). 1. 르호보암 (922-915): 왕상 14: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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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는 북이스라엘에 비해 경제나 군사적인 면에서 열세였다. 그러나 다윗계약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어 다윗왕조는 주전 587년 유다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주전 1000-587년, 예외: 아합의 딸 아달랴가 5년간 통치). 1. 르호보암(922-915): 왕상 14:21-31 a. 르호보암은 북이스라엘이 독립했음에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함(스마야의 신탁[왕상 12:21-24] - 하나님의 뜻과 민심 반영). b. 남유다의 예루살렘과 북이스라엘의 벧엘 사이에 있던 국경선 주위에서 국지전이 아사의 통치 기간까지 지속됨. c. 통치 5년(918년 경)에 애굽왕 시삭의 침공을 받음(왕상 14:25-28). d. 암몬족의 공주 나아마와 솔로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기에 솔로몬 시대 이래로 이교화 경향이 지속되었음을 암시함(15:13). 2. 아비얌=아비야(915-913): 왕상 15:1-8 (15:3) ”아비암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15:3)
3. 아사(913-873): 왕상 15:9-24 a. 40년간 통치(북이스라엘-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아합) b. 종교개혁으로 인해 역사가에 의해 칭찬을 받음(15:11-15) – 산당은 제거하지 못함. c. 북이스라엘의 바아사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북쪽 5마일 지점에 있는 라마를 잃음 - 아람의 벤하닷 1세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의 도움으로 라마를 되찾음(왕상 15:17-22). 4. 여호사밧(873-849): 왕상 22:41-50 a. 아사처럼 성실하게 야웨를 섬긴 자(왕상 22:43). b. 여호사밧의 사법개혁(대하 19:4-11) : 사법개혁이란 율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신앙개혁이다. 그는 공명정대하고 유능한 인물이었다. c. 아람을 대적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아합과 군사적 제휴를 함. d.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아합과 함께 싸우나, 아합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여호사밧은 실패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
5. 여호람=요람(849-842) : 왕하 8:16-24 a. 아합 왕의 딸 아달랴와 결혼하나, 그녀로 인해 우상이 들어와 종교가 부패해짐(왕하 8:18/11:18). b. 에돔이 반란을 일으켜 유다로부터 독립함(왕하 8:20-22) – 유다의 쇠퇴를 보여주는 사건. c. “속을 훑어내리는 고질병”(설사병?)으로 죽음(대하 21:18-20). 6. 아하시야(842) : 왕하 8:25-29 (8:27) • 북이스라엘의 예후에 의해서 살해됨. 7. 아달랴(842-837) : 왕하 11:1-20 •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로, 여호람과 결혼한 왕비였다. 그녀는 남유다의 왕 가운데 유일한 비 다윗왕조의 왕이다. 간신들의 도움으로 자신에게 대항할만한 왕실의 모든 혈육을 죽였다(11:1-3). 그러나 그 가운데 1살 된 요아스만 고모였던 대제사장에 의해 살아남았다. “요아스가 그와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 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11:3)
8. 요아스(837-800) : 왕하 11:21-12:21 a.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서 요아스가 7세 때 다윗왕조 복권(11:12 이하). b. 고모인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 왕이 됨으로 성전을 수리하는 신앙개혁을 함(12:4-16). 9. 아마샤(800-783) : 왕하 14:1-22 • 이스라엘왕 요아스와의 싸움에서 패하며, 성전/궁전의 값진 기물들을 빼앗김(14:8-14). 10. 웃시야=아사랴(783-742) : 왕하 15:1-7 a. 여로보암 2세와 동시대인으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룸 b. 예루살렘의 방비를 개수, 군대 재편(대하 26:9, 11-15),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통상을 확대, 엘랏(에시욘게벨)에 무역을 위한 항구도시를 개설. c. 이사야는 웃시야가 죽던 해에 소명을 받음(사 6:1).
11. 요담(742-735) : 왕하 15:32-38 a. 요담과 함께 선지자 이사야(742-700) 활동 시작. b. 웃시야 이래로 유다의 부흥기였다. 12. 아하스(735-715) : 왕하 16:1-20 a. 북이스라엘의 베가와 아람의 르신이 반앗수르 동맹에 가입하라고 남유다를 침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야는 반앗수르 동맹에 가입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였으나, 아하스는 앗수르를 의지하여 조공을 바치며 원조를 구한다(16:7-8). b. 아하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앗시리아의 제단을 세우면서까지 유화정책(16:10-16). – 야웨의 종교는 혼합종교가 됨(16:3) c.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 - 백성들의 원성 d. 이사야와 미가는 이 시대 유다의 도덕적이며 사회적인 죄(부자가 가난한 자를 약탈, 재판관들의 타락 등), 그리고 신앙적인 죄(우상숭배)를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다.
13. 히스기야(715-687/6) : 왕하 18:1-20:21 a. 종교개혁으로 인해 열왕기 사가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음.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18:5) b. 종교개혁의 목적 1)예루살렘 성전을 유다의 야웨 신앙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 2)앗시리아의 종교와 정치로부터 독립 c. 앗수르의 산헤립(주전 704-681년)이 왕위를 계승하자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에 대한 조공 을 거절하고(18:7) 자기 나라의 독립을 선언함. 독립을 위한 준비로 히스기야 터널을 만듦 (20:20; 대하 32:30).
d. 종교개혁의 내용 : 1)오랫동안 통속적으로 야웨 신앙에 유착되었던 여러 예배 대상을 제거함(구리뱀 - 18:4), 2)유다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개혁에도 힘을 쏟음(대하 30:1-12). e. 유월절 준수(대하 30:13-27), 히스기야의 병과 기도(왕하 20:1-11). f. 산헤립의 1차 공격 : 산헤립은 반란을 일으켰던 바벨론을 진압한 후 주전 701년에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모든 반란 국가로부터 항복을 받아냄(산헤립의 비문을 보면 그는 46의 유다의 성곽도시를 정복하였고, 히스기야와 그의 남은 군대들은 “새장 안의 새와 같이” 예루살렘 안에 갇혀 있게 됨)- 히스기야는 많은 보물을 조공으로 바치며 항복함(18:13-16). g. 산헤립의 2차 공격(왕하 18:17-19:37과 이사야 36장 이하에): 유다의 두 번째 반란으로 주전 689년경 산헤렙이 다시 침공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함락 당하지 않는다고 예언했다(사 36, 37장). 이 예언처럼 예루살렘이 보호됨 : 1)산헤립의 군대가 전염병이나 페스트에 의해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19:35), 2)산헤립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소식이 날아들었기 때문(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