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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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궁궐. 6 학년 6 반 김은 서. 경복궁. 종 목 사적 제 117 호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 년 (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 ( 景福 )’ 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1592) 으로 인해 창덕궁 · 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 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 그러나 1895 년에 궁궐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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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ation 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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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궁궐

6학년 6반

김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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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종 목 사적 제117호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시해되는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궁궐이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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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종 목 사적 제123호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

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들의 침전이 있었으며,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그 예로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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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종 목 사적 제122호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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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종 목 사적 제124호

소 재 지 서울 중구 정동 5-1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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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종 목 사적 제271호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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